우리가 흔히 미다스 혹은 마이더스라 부르는 인물은 그리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로, 프리지아 지방의 통치자였다. 음주의 신 디오니소스를 길러준 실레노스가 여행 중 길을 잃고 프리지아를 방문하자 따뜻하게 환대했는데, 이를 감사히 여긴 디오니소스로부터 손에 닿은 모든 것이 황금으로 변하는 능력을 부여받게 된다. 이 이야기에서 유래한 '미다스의 손'이라는 표현은 관여하는 분야마다 잇달아 큰 성공을 거둔 실력자를 일컫는 말로 널리 통용되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현재 러시아 국가대표팀 감독이자 잉글랜드 강호 첼시의 사령탑으로 활동 중인 거스 히딩크(Guus Hiddink)는 축구계를 대표하는 '미다스의 손'이라 부를 만하다. 부임하는 팀마다 해피엔딩으로, 그리고 영광의 기억으로 환히 물들이고 있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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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의 탄생
거스 히딩크 감독 성공시대의 출발점은 자국 명문 아인트호벤 지휘봉을 맡은 19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전 4년간 코치로 활동하며 효율적인 선수 지도 방식과 팀 운영 체계 등을 꼼꼼히 익힌 히딩크 감독은 정식 감독으로 부임하자마자 선수단 분위기 장악에 주력하며 강력한 개혁드라이브로 우승행진의 시동을 걸었다. 다행히 결과 또한 훌륭했다. 데뷔무대였던 1987-88시즌 자국리그와 FA컵을 석권한 히딩크 감독은 유러피언컵(챔피언스리그의 전신)마저 제패하며 아인트호벤을 유럽클럽대항전에 어울리는 팀으로 격상시켰다. 이전까지 아약스와 페예노르트의 2파전 양상으로 진행되던 우승권 경쟁 구도에 아인트호벤이 본격적으로 참여한 것 또한 이 무렵부터의 일이다. 1990년까지 3시즌 동안 아인트호벤에서 102경기를 치렀는데, 71승19무13패를 기록해 승률 69.61%라는 대기록을 남겼다. 이는 그간의 지도자 이력을 통틀어(첼시와 러시아대표팀 제외) 히딩크 감독이 남긴 발자취 중 가장 높은 수치이기도 하다. 참고로 한국대표팀 재임 기간 중 거둔 승률은 58.62%로, 2002월드컵 본선무대를 포함해 총 29경기서 17승6무6패를 기록했다.
아인트호벤에서 거둔 성공은 이후 히딩크가 다양한 이력을 쌓아나가는데 적잖은 도움이 됐다. 터키 명문 페네르바체(1990-91), 라 리가 강호 발렌시아(1991-94) 등을 거쳤고 네덜란드대표팀 감독(1995-98)을 역임했다. 이후엔 레알마드리드(1998-99)와 레알베티스(1999-2000) 등지에도 몸담았다. 하지만 지도자 인생의 물줄기를 바꿔놓은 사건은 역시나 2002월드컵을 앞두고 공동개최국 한국의 대표팀 감독으로 취임한 것이었다. 이전까지 4회 연속 월드컵 본선무대에 나서고도 단 1승도 거두지 못했던(4무10패) 한국은 히딩크와 손을 잡은 후 체계적인 조련 과정을 거쳐 새로운 팀으로 거듭났고, 이는 '2002월드컵 4강 등정'이라는 기대 이상의 결과로 이어졌다. 2006월드컵과 유로2008을 앞두고 각각 호주대표팀과 러시아대표팀 사령탑으로 낙점 받을 수 있었던 것 또한 2002년의 여운이 강하게 작용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물론 히딩크 감독은 두 대회서도 소속팀을 각각 16강(2006월드컵/호주)과 4강(유로2008/러시아)으로 견인하는 등 기대 이상의 결과물을 남기며 '마법사'의 이미지를 더욱 굳건히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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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주함 없는 도전자
2002월드컵 4강 신화 직후 국내에는 한동안 '히딩크 열풍'이 강하게 휘몰아쳤다. 거취와 관련한 보도가 줄을 이었고 방송과 지면 광고를 통해 친근한 네덜란드 출신 노(老)지도자의 얼굴이 빈번하게 노출됐다. 자서전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고 '히딩크의 리더십', '히딩크식 경영학' 등이 흥미로운 연구주제로 떠올랐다. 실제로 삼성경제연구소는 월드컵 직후 발간한 보고서를 통해 히딩크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요인을 ▲전략과 전술에 대한 전문적 식견 ▲공정한 선수 선발 시스템 ▲원칙과 규율의 강조 ▲올바른 방향과 비전 제시 ▲선수들에 대한 신뢰와 흔들림 없는 소신 등 5가지로 정리해 발표하기도 했다.
더불어 편한 자리에 안주하지 않았다는 점 또한 히딩크 감독의 특징으로 손꼽힌다. 그간 남다른 지도력에 반한 명문 클럽들과 축구강국들이 좋은 조건을 제시하며 앞 다퉈 러브콜을 보냈지만 히딩크 감독은 모두 고개를 저었다. 대신 '상대적 약체', '축구 불모지', '변방국' 등으로 표현되는 팀들을 선택하는 '파격'을 보여줬다. 한국과 호주, 러시아 등 세계축구계에서 비주류로 분류되는 나라의 사령탑으로 부임한 것이 좋은 예다. 우승 가능성이 높은 팀을 선호하는 여느 지도자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행보로, 이는 히딩크 감독이 축구팬들 사이에서 '모험을 즐기는 도전자'로 평가받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특유의 선택 기준에 대해 모두가 긍정적인 반응을 내놓는 것은 아니다. 일부에서는 " 자신의 입맛에 맞춰 팀을 마음대로 주무르기 위해, 또는 결과가 좋지 못할 경우 예상되는 비난의 화살을 최소화하기 위해 주목도가 낮은 팀을 고르는 것 " 이라며 탐탁지 않은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준수한 성적을 거두면 '역경을 딛고 일어선 주인공'으로, 결과가 기대에 못 미치면 '불리한 환경 속에서도 최선을 다한 지도자'로 자신을 포장하기 위한 소극적 선택이라는 비판이다. 물론 판단은 자유인만큼 히딩크 감독의 결정과 행동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존재할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제껏 히딩크는 새로운 도전에 나설 때마다 번번이 기대 이상의 성과를 이뤄냈고, 이를 통해 스스로의 가치를 높여왔다는 사실이다.
합리적인 해결사
유로2008 기간 중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러시아대표팀은 '돌풍의 진원지'로 불리며 스포트라이트의 주인공으로 대접받았다. 조별리그를 통과하면서부터 높아지기 시작한 취재 열기는 8강에서 러시아가 강력한 우승후보 네덜란드를 꺾은 이후 절정에 달했다. A.아르샤빈(아스날), R.파블류첸코(토튼햄) 등 주축 선수들의 움직임을 지켜보기 위해 매일 수백 명의 취재진이 훈련장에 몰려들었고 히딩크 감독의 일거수일투족, 말 한마디 한마디가 시시각각 전파를 탔다. 당시 히딩크의 전사들이 기대 이상의 역량을 과시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 전문가들은 '월등한 체력'과 '협력플레이'를 첫 손에 꼽았다. 객관적인 기량 면에서 상대적으로 뒤쳐지는 러시아 선수들이 한발 더 뛰는 부지런함과 효율적인 팀 플레이를 통해 흐름을 유리하게 풀어나갔다는 뜻이다. 실제로 오렌지군단과 치른 8강전의 경우 후반 중반 이후부터 네덜란드 선수들 중 다수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둔화된 것과 달리 러시아 선수들은 종료 휘슬이 울릴 때까지 활기찬 움직임을 유지해 분명한 대조를 이뤘다. 이러한 현상은 2002월드컵 당시 대한민국의 경기 양상과 일맥상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당시 한국은 강한 압박을 통해 경기 주도권을 장악한 후 필드플레이어 전원이 공격과 수비에 적극 가담하는 토털 축구로 상대를 괴롭혔고, 이를 통해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2002년의 한국대표팀과 2008년의 러시아대표팀의 성공사례는 소속팀의 특징과 장단점을 냉철하게 분석한 후 현실적으로 가장 합리적인 해결방안을 제시하는 히딩크 감독의 노력이 실효를 거뒀음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자료이기도 하다.
마법은 계속되는가
지난 2월 말 거스 히딩크 감독이 첼시의 임시 사령탑으로 부임하자 현지 축구 관계자들은 " 히딩크 리더십의 실체를 확인할 절호의 기회가 왔다 " 며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했다. 기량 면에서 유럽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는 선수들이 즐비한 데다 주어진 시간이 3개월에 불과한 만큼 팀을 이끄는 과정에서 전술적인 대처능력과 선수단 장악 능력이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이라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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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긍정과 부정의 전망이 엇갈렸으나 일단 초반에 대한 현지 분위기는 '기대 이상'이라는 평이 지배적이다. 정규리그서 선두 맨체스터Utd.와의 승점 격차가 꾸준히 좁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챔피언스리그 무대에서도 세리에A 강호 유벤투스를 제압하고 8강 진출에 성공하는 등 긍정적인 뉴스가 줄을 잇는 까닭이다. 코칭스태프와 불화를 빚으며 노골적으로 이적을 요구하던 최전방 공격수 D.드로그바가 히딩크 감독 부임 이후 '순한 양'으로 변모한 것 또한 새 사령탑이 선보일 '마법'에 대한 기대감이 작용한 결과로 풀이된다.
같은 맥락에서 계약 만료 후 지도자와 구단의 입장에 어떤 변화가 생길지의 여부 또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히딩크 감독은 러시아대표팀 감독직을 겸하는 자신의 처지를 들어 " 기간 연장은 없을 것이며 시즌이 종료되면 곧장 러시아로 돌아갈 것 " 이라는 입장을 거듭 밝힌 상태다. 하지만 단기간에 팀 분위기를 다잡으며 희미해진 정상 정복의 꿈을 되살린 '검증된 지도자'를 구단 측이 순순히 포기할 것으로 보는 전문가들은 거의 없다. 실제로 영국 언론들은 " R.아브라모비치 첼시 구단주가 히딩크 감독과 계약기간을 연장하는 대신 D.아드보카트 제니트 감독에게 러시아대표팀 지휘봉을 맡기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 는 보도를 내놓기도 했다.
가는 곳마다 승리와 환호를 선사한바 있는 히딩크 감독의 마법은 종착지를 향해가는 올 시즌 프리미어리그 무대에서도 어김없이 발휘될 수 있을까. 첼시의 궁극적 바람인 챔피언스리그 우승의 꿈을 현실로 만들 수 있을까, 그리고 '푸른 군단'은 다음 시즌에도 '미다스의 손'과 손을 맞잡고 이상의 길을 걸을 수 있을까. 관심을 갖고 지켜볼만한 포인트가 여럿이다.
text by Ji Hoon S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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